중소돌의 기적은 옛말이 됐다
2025년 한 해, 중소기획사 아이돌 씬은 조용한 재앙을 맞았다. 8월, 마마무의 동생 그룹으로 불리며 기대를 모았던 퍼플키스가 데뷔 4년 만에 해체를 발표했다. 불과 한 달 전 새 싱글을 발매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이었다. 충격은 컸다. 2월엔 신인상 6관왕을 휩쓴 위클리가 사라졌고, 에버글로우·루미너스·슈퍼카인드도 잇따라 해체 수순을 밟았다. 공통점은 하나다. 표준전속계약서상 최대 기간인 7년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
이보다 앞선 사례들도 있다. 한때 '중소돌의 기적'이라 불렸던 인피니트·걸스데이·여자친구·마마무. 데뷔 당시 소형 기획사에서 출발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그룹들이다. BTS조차 '흙수저 아이돌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간혹 피프티피프티나 에이티즈 같은 예외 사례가 나오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그것이 점점 더 예외적인 사건이 되어간다고 말한다.
(전작 3.7만장의 35% 수준)
(이후 신보들은 2만장 수준으로 재하락)
플레이브 외 전원 대형사 소속
(한국음악콘텐츠협회, 2025)
숫자는 냉혹하다. 한국음악콘텐츠협회가 집계한 2025년 상반기 국내 음반 판매량 상위 30위 안에 오른 그룹은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를 제외하면 모두 대형 기획사 출신이다. SM 신인 걸그룹 하츠투하츠는 데뷔 싱글 초동 40만장으로 걸그룹 역대 1위를 기록했다. JYP 신예 킥플립은 두 번째 미니 앨범으로 34만장을 넘겼다. 같은 시기 중소기획사 신인들의 초동은 수천 장 단위에 머물렀다.
"음원 대박을 친 극소수 팀을 제외하면 행사로 제작비를 겨우 메꾸거나 빚만 쌓다 계약이 끝난다."
— 중소 기획사 홍보 관계자 (뉴시스, 2025.08)비용은 오르고, 시장은 굳었다
중소기획사 아이돌의 위기는 단순한 실력·운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가 바뀌었다. 노래 한 곡에도 다수의 작곡가와 스타 안무가가 투입되고, 화려한 뮤직비디오와 해외 진출까지 진행하면서 제작 비용이 크게 늘었다. 코로나19 이후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숏폼·롱폼·유료 팬 플랫폼·라이브 스트리밍 등 다매체 환경에 대응해야 하는 부담도 커졌다.
한 중소 기획사 관계자는 "실력파 멤버를 보유해도 2~3년 안에 수익을 내지 못하면 웬만한 군소 기획사는 손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적자가 심각하면 컴백 시기가 늦춰지고, 활동 지원까지 힘들어지면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라고 말했다.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 예산이 올라갈수록, 중소기획사가 '비슷해 보이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도 함께 올라간다. 팬들의 기대치는 하이브·SM 기준으로 형성되는데, 그 기대치를 충족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중소기획사가 감당하기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일각에선 K팝 시장에 거는 기대 때문에 경험 없이 뛰어드는 투자자들도 문제로 지목된다. 가요계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 성공 사례만 보고 뛰어드는 것 같다. 연차는 있지만 이름이 생소한 그룹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걸 보면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헌식은 "K팝이 대외적으로 인기가 많고 활약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중소돌을 포함해서 대단히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정부와 기획사들의 협업을 통한 구조 강화를 촉구했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는 2026년 중소기획사의 해외 진출에 30억 원 규모의 지원 계획을 밝혔지만, 업계에선 "잔불을 끄기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거제"가 중요하다
이 구조 속에서 2026년 상반기, 리센느(RESCENE)의 "거제" 클립이 터졌다. 멤버가 팬 소통 자리에서 경상도 방언 억양으로 고향을 언급한 짧은 장면. 팬들의 손을 거쳐 숏폼 클립과 트위터 밈으로 순식간에 재가공됐고, "야호" 발언까지 이어지며 케이팝을 전혀 소비하지 않던 계층에게도 이름이 알려졌다.
이 현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종류의 노출이기 때문이다. SM이 하츠투하츠 데뷔에 투입한 마케팅 예산으로도 "거제" 클립 같은 바이럴 모멘트는 만들 수 없다. 밈은 예산이 없어서, 혹은 관리가 덜 돼서 생겨나는 '틈'에서 태어난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중소기획사에게 유일한 비용 무관 채널이 된다.
"밈은 중소기획사가 살 수 있는 광고가 아니다. 그것은 대형 기획사가 절대 사려 해도 살 수 없는 무언가다."
— 케이팝 팬덤 연구자들의 공통된 관찰TikTok이 바꾼 음악 산업의 규칙
이것은 케이팝만의 현상이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TikTok 바이럴이 수십 년 전 발매된 곡을 현역으로 부활시키고, 음악 업계의 기존 마케팅 공식을 뒤엎고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 인사이트는 하나다. "아무도 돈을 쓰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1999년 발매된 곡. 2022년 젊은 여성들의 TikTok 댄스 영상으로 재점화됐다. DJ Paul은 "콘서트에서 그 라인이 나올 때 이제 관객들이 미친 듯 반응한다"고 말했다. 17년 전 곡이 현재 최고 인기 곡이 된 것이다.
2001년 발매된 23년 된 곡이 약 300만 개의 TikTok 영상에 사용됐다. 스포티파이 스트리밍이 130% 증가했으며, 아티스트는 현재도 이 곡을 정규 투어 셋리스트에 유지하고 있다.
1997년 발매된 B사이드 곡. 활동 중단 기간 중 스트리밍 모멘텀이 생기며 2022년 재결성 투어의 앙코르 곡이 됐다. 1990년대에 다섯 번도 안 연주한 곡이 이제 투어의 핵심 트랙이다.
1986년 발매 앨범의 수록곡. 밴드가 신보를 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TikTok에서 140만 개 이상의 영상에 사용됐다.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300만 명 돌파. 멤버는 "아무도 돈을 쓰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공통 법칙이 있다. 바이럴을 만들려 한 시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Cocteau Twins의 멤버 사이먼 레이먼드는 "물론 음반사들이 'TikTok 히트'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답은 그걸 만들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투어 에이전시 임원 트레이 매니(Wasserman Music)는 소셜미디어와 스트리밍이 이끄는 카탈로그 부활을 "수십 년 경력에서 본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서양 음악 씬에서 TikTok 바이럴은 주로 구곡(catalog)을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미 팬베이스가 있는 아티스트의 새로운 청중 확장이다. 케이팝 중소돌에게 바이럴은 다르다. 팬베이스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최초 인지를 만드는 수단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고, 아무도 돈을 쓰지 않았으며, 그래서 더 강력했다.
중소돌 밈의 세 가지 형태와 확산 구조
바이럴 모멘트는 유형에 따라 확산 메커니즘과 팬덤 전환력이 다르다. 중소돌 밈은 크게 세 가지 패턴으로 분류된다.
방언, 발음 실수, 특유의 억양이 원재료다. 텍스트로 재현하기 쉬워 트위터 확산 속도가 가장 빠르다. 언어 자체가 밈의 형식이 되기 때문에 재생산 비용이 0에 가깝다. 비(非)팬이 맥락 없이도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
공연이나 팬 소통 중 포착된 과장된 표정, 예상 밖의 반응이 GIF·숏폼 클립으로 재가공된다. 비(非)팬에게 접근하기 쉬운 관문 역할을 하며, 틱톡·인스타 릴스 중심으로 확산된다. Pavement 투어에서 새 팬들이 줄을 서는 것과 같은 구조다.
"왜 웃긴지 설명할 수 없지만 웃기다"는 반응을 유발하며, 설명을 시도하는 2차 콘텐츠가 연쇄 생산된다. Cocteau Twins의 "Sea, Swallow Me"처럼 원 클립보다 2차 콘텐츠의 수명이 더 길어 장기 노출 효과가 가장 크다.
밈의 생애 주기
밈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전환되나
발원지와 팬덤 전환 플랫폼은 다르다. 대부분의 케이팝 밈은 트위터에서 텍스트 밈으로 처음 재가공되지만, 실질적인 팬덤 전환은 틱톡과 유튜브에서 일어난다. 뉴욕타임스가 분석한 서양 사례도 같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호기심을 만들고, 라이브 공연과 바이닐 리이슈가 정착을 만든다.
| 플랫폼 | 밈 역할 | 알고리즘 특성 | 팬덤 전환력 |
|---|---|---|---|
| 트위터(X) | 발원지 · 텍스트 재현 | 팔로워 무관 확산, 실시간 트렌드 | 중간 |
| 틱톡 | 숏폼 증폭 | 비(非)팬 노출 최대화, 반복 재생 | 높음 |
| 유튜브 쇼츠 | 2차 콘텐츠 허브 | 검색 연계, 아카이브 효과 | 높음 |
| 스포티파이 | 스트리밍 유입 | 알고리즘 추천 연계, 장기 노출 | 중간 |
| 인스타그램 | 릴스 재확산 | 팔로워 기반 한계 존재 | 중간 |
| 국내 커뮤니티 | 디시·에펨 증폭 | 국내 집중, 2차 가공 활발 | 낮음 (국내 한정) |
주목할 것은 Wasserman Music의 임원이 짚은 대목이다. "스트리밍 수치와 콘서트 참석 사이에는 정확한 상관관계가 없다." 누군가 댄스 챌린지에 참가하거나 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티켓 구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열정과 기회가 맞아떨어질 때, 그 임팩트는 압도적이다. 2022년 Beach House 투어에서 십대들이 7-Eleven 봉투를 들고 하루 종일 줄을 서는 장면이 그것을 증명했다.
인지에서 팬덤까지 — 3단계 전환 모델
밈의 확산이 곧 팬덤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환은 구조적으로 세 단계를 거치며, 각 단계마다 병목이 존재한다.
비(非)팬이 밈을 통해 그룹명을 처음 인식하는 단계. "저 그룹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이 발생한다. 핵심은 밈이 그룹명을 명확히 연결시키느냐다. Cocteau Twins의 경우처럼 곡 이름은 알아도 밴드명을 모르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신규 유입자가 음악·영상을 직접 찾아보는 단계. 가장 결정적인 병목이다. Pavement가 2022년 투어 앞두고 셋리스트를 재설계한 이유가 바로 이 단계다. "생각보다 좋네"라는 반응이 나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반복 소비가 팬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지는 단계. 팬카페 가입, 굿즈 구매, 콘서트 참여 등 경제 행동이 수반된다. 기존 팬 커뮤니티가 신규 유입자를 얼마나 환대하는가가 전환율을 좌우한다.
= 실질적 팬덤 성장
① 숏폼 최적화 클립 라이브러리 — Pavement가 "Harness Your Hopes"를 앙코르로 전략 배치한 것처럼, 밈 발생 직후 신규 유입자가 접할 '입문 콘텐츠'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② 아카이브형 온보딩 콘텐츠 — '멤버 소개', '히스토리', '베스트 무대' 등 신규 팬이 그룹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 구성이 효과적이다.
③ SNS 알고리즘 친화적 업로드 패턴 — 바이럴 직후 72시간 이내에 관련 공식 콘텐츠가 올라오지 않으면 알고리즘이 유입 트래픽을 엉뚱한 곳으로 흘려보낸다.
④ 팬 커뮤니티 온보딩 문화 — Beach House 공연에 줄을 선 십대들처럼, 새로 온 팬들이 '환영받는다'는 감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밈 기반 성장의 구조적 한계
바이럴 모멘트에 의존하는 전략에는 네 가지 구조적 위험이 있다. 하이키가 '서울 드리밍'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은 뒤 이후 음반들이 반토막 이하로 재하락한 것은 이 리스크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 리스크 유형 | 구조적 원인 및 사례 |
|---|---|
| HIGH 지속성 부재 |
밈은 빠르게 소비되고 잊힌다. 바이럴 트래픽이 팬덤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일회성 스파이크에 그친다. 하이키의 '서울 드리밍' 이후 초동 급감이 전형적 사례다. 72시간 이내에 콘텐츠 생태계가 유입자를 붙잡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진다. |
| MID 이미지 고착 |
밈 이미지가 음악성과 괴리될 경우 "그 웃긴 그룹"에 갇힌다. Cocteau Twins의 기타리스트 로빈 거스리가 "Gen Z의 호기심 깊이가 확실하지 않다"고 회의적 시각을 보인 것도 이 우려다. 밈으로 알려졌지만 음악으로 기억되지 못한 그룹들의 사례는 케이팝 역사에서 반복된다. |
| LOW 재현 불가능성 |
레이먼드의 말처럼 "만들 수 없다." 성공한 밈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려는 시도는 거의 항상 역효과를 낳는다. 팬들은 억지 밈을 빠르게 감지하며, 이는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비선형적·예측 불가능한 성장은 기획사의 중장기 플래닝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
| MID 팬덤 질 저하 |
밈으로 유입된 팬의 충성도는 음악적 관심으로 유입된 팬보다 평균적으로 낮다. 음반 판매·콘서트 참여·굿즈 소비 등 핵심 팬덤 경제에서의 참여율이 희석될 수 있다. 숫자는 늘지만 실질 수익으로 연결되는 깊이가 얕아지는 구조다. |
밈은 문이다. 방 안을 채우는 건 음악이어야 한다
퍼플키스·위클리가 해체하고, 음반 차트 상위 30위가 대형사 일색이 된 2025년의 K팝 씬.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중소기획사 생존의 시대에, "거제" 클립은 하나의 탈출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탈출구가 될 수 있다.
Cocteau Twins의 레이먼드가 말했듯, "아무도 돈을 쓰지 않았고, 캠페인도 없었다. 그것이 다른 모든 것과 다른 점이다." 중소기획사에게 바이럴 모멘트는 대형사가 살 수 없는 유일한 자원이다. Three 6 Mafia가 17년 된 곡으로 현재 최고의 반응을 끌어내고, Beach House가 십대들로 가득 찬 공연장을 다시 채운 것처럼, 밈은 시장 구조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창이 열렸을 때 무엇이 있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이키가 역주행 이후 재하락한 이유, Pavement가 셋리스트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 이유가 같다. 밈은 문이고, 음악이 방이며, 팬 커뮤니티가 그 방에 머물게 하는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의 30억 지원이 중소기획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그 방을 채울 시간을 버는 것이다.